신인상
현대시작법
백목인
눈을 감습니다 시작이군요
보이는 모든 것은 멈춰있습니다 쏟아져 내리던 햇빛도 수십 년을 녹슬어 왔던 슈퍼의 간판도 잠시 녹슬기를 멈추고 있네요
그렇게 멈추다 끝나고
눈을 뜨면은 간단한 세면을 마치고 아침을 먹습니다 손을 떠는 병이 있어 자칫 우유를 쏟을 뻔합니다 정말로 쏟아버린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지만요
정말로 쏟아버리게 되면
그때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자켓을 걸치고 원룸을 나옵니다 햇빛이 아직 따사롭네요 자칫 눈을 감을 뻔했지만 아직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전거 자물쇠를 풀고
제가 사는 마을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제게는 좋은 일이지요 시 한 편은 머릿속으로 퇴고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힘들지만요
마을의 지도는 외우고 있고
어딘지 알 것도 같군요 이제 거의 다 왔겠군요
네
이곳이네요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네요
보이는 것은 햇빛과 수십 년을 녹슬고 있는 슈퍼의 간판 ‘담배’ ‘CIGARETTES’ 그리고 ‘미란다’······ 꿈에서와는 달리 모든 것은 멈추지 않았고 저는 비로소 안심합니다
이러면 눈을 감을 수 있겠군요
시작이군요 그러면
보이는 모든 것은 멈춰있습니다 사십오억 년을 쏟아져 내리던 햇빛도 지구의 자전이 멈추는 빌어먹을 재난도 아직은 멈춰있군요 이대로 제가 멈춰버린다면 정말로 모든 것이 멈춰버리겠지요
정말로 멈춰버리게 되면······
네
시를 읽는 한 사람이 보이는군요 당신이 저를 돌고 있군요 멈춘 채로
곧 찾아뵙겠습니다
백목인
2025년 《시결》로 등단.